메뉴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컨텐츠 바로가기

청봉청운대선사

청봉청운대선사

청봉청운대선사

  • 제77대 혜암대선사

    語默動靜句(어묵동정구) 箇中誰敢着(개중수감착)
    問我動靜離(문아동정리) 卽破器相從(즉파기상종)
    어묵동정 한마디 글귀를 이 가운데 누가 감히 부딪칠 것이냐?
    나에게 동정을 여의고 이르는 말을 묻는다면
    곧 깨진 그릇은 서로 맞추지 못한다고 하리라.
    悟道頌이다.
    행장기
    오도송 어묵동정 한마디 글귀를 이 가운데 누가 감히 부딪칠 것이냐? 나에게 동정을 여의고 이르는 말을 묻는다면 곧 깨진 그릇은 서로 맞추지 못한다고 하리라.
    전법게 구름과 산은 같고 다름이 없고 또한 대 가풍도 없구나 이와 같이 글자없는 인을 혜암 네게 나누어 부촉하노라
    열반게송 "무상(無相), 무공(無空), 무비공(無非空)"이라. "본래 형상도 없고 빈 것도 없으며 빈 것이 없다는 그것도 없다"

상세정보

 혜암선사(惠菴玄門 禪師) 행장기(行狀記)


혜암선사는 1884년 12월17일(음 12월 1일) 황해도 백천군 해월면 해암리에서 강능최씨 사홍공(사홍공)과 전주 이씨의 3대 독자로 출생 하셨다.

사(師)의 속명은 최순천(崔順天)이었다.

탄생하던 날 모친께서 꿈에 보살님 한분이 흰 코끼리를 타고 하늘에서 하강하여 꽃과 보배로 장엄한 암태(岩台)위에 앉아 계시다가 품속에서 감로병 하나를 거네주고 사라졌다 한다.

그 날 새벽 사(師)를 순산하니 그때 햇무리가 져 해암리 일대를 감싸고 있었다 한다. (영결식 때도 또한 햇무리가 장관이었다.)

모든 것이 인연이라 했다. 빈한한 농가 생활이었지만 유년 시절을 화목하게 지냈는데, 1894년 11세에 부친상을 당하고 이듬해 출가를 결행하였다.

그 후 경기도 양주군 별래면 수락산 흥국사(興國寺)에 입산하여, 1899년 15세 때 이보암(李保庵)스님을 은사로 표금운(表錦雲)스님을 계사(戒師)로 모시고 득도(得度)하여 법명르 현문(玄門)이라 하였다.

그 무렵 속가에 홀로 남은 만년의 모친께서 아들 그리운 마음을 달랠길 없어 사(師)를 찾아와 사중(寺中)에서 함께 지내고 계셨다.

모친께서는 초산에 실패하고 늦게까지 태기가 없던중 48세에야 사(師)를 낳았다고 한다. 그러나 사께서 17세 되던 해에 모친마저 타계하고 말았다. 사(師)께서는 마음을 잡지 못하고 6년 동안 정처없이 사방팔방 두루 돌아다녔다. 훗날 이때를 회고하여 게송을 읊으시기를

行狀衲衣一技窮(행상납의일기궁)

東走西走走無窮(동주서주주무궁)

傍人苦問何處走(방인고문하처주)

天下橫行無不通(천하횡행무불통)

누더기 한 벌과 지팡이 하나로

동서방 달리기 끝없이 하였네.

만약 누가 어디로 그리 달렸느냐 묻는다면,

천하를 가로질러 통하지 않는 곳 없다 하리라.

하신 것처름 거칠 것 없이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셨다. 23세 때에는 드디어 발심하여 통도사 내원선원에서 처음으로 하안거(夏安居)에 들어가 수도(修道)에 매진하기 시작하였다.

26세 때에는 서해담(徐海曇)스님으로부터 구족계를 받으시니 이때의 법명을 性岩이라 하였다.


어제가 새봄이더니 오늘은 가을이 되었네.

해마다 날 바꿔 달 가기 시냇물 흐르듯

명성 탐하고 이끗을 찾아 구구히 떠다니는 자여

회포를 미처 채우기도 전에 쇤머리로 돌아오네


부모도 나와 친하지 않나니

뉘 가장 친하냐고 하면

눈 먼 거북과

절름발이 자라라 하리라.


눈 먼 거북의 나무토막 만난 인연이며

영산회상에 꽃들어 높은 기틀 보임이로다.


28세 때 박성월(朴性月)스님의 회상(會上)에서 성월 선사로부터 화두 법문을 간택받아 계속 정진하던중, 피나는 용맹정진 끝에 34세 되던 해에 비로소 대오(大悟)하셨다.


오대산의 용성선사께서 만공선사에게 물으셨다.

용성 : 語默動靜[말하는 것, 침묵하는 것, 움직이는 일, 가만히 있는 일]을 여의고 한마디 일러 보시오.

만공 : ……….

용성 : 良久란 말이요?

만공 : 아니오!

이 법담은 여기서 끝나고 뒤에 전강스님이 이 이야기를 듣고는 곧장 평해 말씀드리게 되었다.

전강 : 두 선지식께서 서로 부등켜 안고 진흙탕 속으로 빠진 격입니다.

만공 : 그럼 자네 같으면 어떻게 하겠는가?

전강 : 어묵동정을 여의고 도대체 무엇을 이르란 말씀입니까?

만공 : 옳다, 옳다.


혜암 師께서는 이 법담이 크게 마음에 걸려 참구하여 오시다가 드디어 기회가 오자 전강선사에게 물으셨다.

혜암 : "어묵동정을 여의고 도대체 무엇을 이르란 말씀입니까"라고 노 선지식께 아뢴 그것이 옳단 말이오? 어째서 여읠[離]것이 있는데 이를[吐] 할것이 없다는 말이오?

전강 : ……….

혜암 : 그럼 내게 노스님께 여쭌 것처럼 물어 보시오.

전강 : 어묵동정을 여의고 한마디 일러 보시오.

"이것은 胎中에 들어가기 전의 소식을 알아야 하오. 태중에 들어가기 이전의 소식은 무엇이냐?

나보고 이 도리를 이르라 하니 "破器相從이라, 즉 깨진 그릇은 맞추지 못한다 하겠다"하시고

이에 게송을 지으시니


語默動靜句(어묵동정구)

箇中誰敢着(개중수감착)

問我動靜離(문아동정리)

卽破器相從(즉파기상종)


어묵동정 한마디 글귀를

이 가운데 누가 감히 부딪칠 것이냐?

나에게 동정을 여의고 이르는 말을 묻는다면

곧 깨진 그릇은 서로 맞추지 못한다고 하리라.


悟道頌이다.


전강선사께서 평하기를, "부처님 말씀을 탁마하는 것이 조사들이라 공안을 탁마하지 않고는 바른 불제자가 되지 못한다"


그 후 사(師)께서는 만공(滿空), 혜월(慧月), 용성(龍城), 한암(漢岩)선사등 당대 선(禪)의 거승(巨僧)들을 차례로 모시고 지도를 받고, 인가를 받은후 계속 보임(保任)하셨다.

이때에 사(師)께서 잠깐 동안 묘향산 상원사(上院寺)와 강원도 정선군 정암사(淨巖寺) 주지를 역임하신 것이 사판 소임으로서는 전부였다.

사(師)께서는 35세 때 경허(鏡虛)대종사의 법맥을 이은 만공(滿空) 대선사로부터 의발을 받으시고


雲山無同別(운산무동별)

亦無大家風(역무대가풍)

如是無文印(여시무문인)

分付惠菴汝(분부혜암여)


구름과 산은 같고 다름이 없고

또한 대 가풍도 없구나

이와 같이 글자없는 인을

혜암 네게 나누어 부촉하노라


라는 전법게를 받아 혜명(慧明)을 이어받았으니, 법호(法號)는 혜암(惠菴)이었다.

(처음에는 慧(혜)자를 썼으나 혜월(慧月)선사와 같은字를 피하여 惠(혜)자를 쓰셨으니 이는 사(師)의 겸허한 배려였다.)

이날 만공 대선사의 생신이라 대중이 금선대(錦仙臺)에 모였을 때였다.

만공조실께서 문득 지필묵을 준비하게 하시고 즉석에서 게송을 써주시며"이 전법게는 생일 선물이라는 것일세" 하시니, 사(師)께서는 "스님 제 공부가 아직 멀었고, 법을 전해받을 만한 그릇이 못 되옵니다"하고 겸양해 하시자, 만공조실께서 선뜻 일어나 다락에서 바루(鉢)를 꺼내시더니 "그럼 이 그릇을 쓰게나."하시고 큰 상을 차려 주셨다.

이로써 석가세존 이후 달마- 육조혜능- 임제- 청허- 경허- 만공선사를 이어 세존(世尊)하 77대(代)가 되신 것이다.

이때부터 사(師)께서는 만공선사를 모시고 금강산 마하연(摩하衍), 유점사, 예산 정혜사(定慧寺), 천장암(天藏庵) 등지에서 탁마를 하셨다.

만공선사께서 열반하신 후에는 다시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두타행(頭陀行)을 하셨다.

항상 검소한 생활로 추우면 추운 대로 더우면 더운대로 족함을 느끼시며, 주위에서 조금이라도 자신의 몸에 이로움을 취해 드리려 하면 극구 반대하셨다.

아래 사(師)의 좌우명이며 후학들에게 주시는 교훈인 게송을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輕衣美食(경의미식)은

當恩重而損道(당은중이손도)요

破衲蔬食(파납소식)은

必是施而積恩(필시경이적은)이라

부드러운 옷과 맛난 음식은

은혜가 무거워 공부하는 데 손해가 될 것이요,

떨어진 누더기와 나물로 만든 밥은

시주 은혜가 가벼워 은덕을 쌓는다.


만공 조실스님이 입적하시자 덕숭산 또한 빈 집이 되었다.

몇몇 선덕 스님들이 모여 상의한 끝에 사(師)를 모셔 조실로 추대하였다.

그러나 역시 거절하셨다.

"조실이란 자리 생지옥일세. 하필이면 그겐가? 그저 공부나 같이 함세."

1956년부터는 덕숭산 수덕사 조실(祖室)로 억지로 추대받고 머무르고 계시면서 눈밝은 납자들을 제접하여 선풍을 떨쳤다.

그 후 서울 정릉 팔정사(주지 蓮湖스님)와 선학원, 공주 마곡사의 조실로도 추대되었으며 재가 수행단체인 달마회등 선학자들을 지도하셨다.

사(師)께서는 승속을 가리지 않고 선방(禪房)에서는 화두법문을, 산천에서는 시를 읊으시며 오직 중생 제도에 전력을 다하셨다.


몸벗는 그 날까지 공들여 나아간 힘으로 지옥의 고통을 면할지언정

다소의 자부심으로 생사의 바다에 뛰어들지 말 일이다.

스승없는 공부는 죽음과 같으며,

탁마없는 공부는 발광(發狂)해 미친 짓이며,

공들이지 않는 공부는 병든 것이다.

"선지식을 여의고 산다는 것은 부모가 없는 것보다도 무서운 일이다"

사(師)의 말씀이다


한때 시자가 여쭈었다.

"깨달음이 없는 제자는 무슨 인연으로 佛祖의 혜명을 잇는 것입니까?"

노사께서 말씀하시었다.

"견성이다 견성이 아니다 하는 것은 한가닥 功行을 이른 것이니,

간절 切字로 믿음의 내용을 삼으면 견성이 그것이요,

信이 없으면 마음에 공행이 끊어져 결국 생사의 바다에 떨어지게 되니

이를 일러 '性稟을 못 보았다'하느니라."


밤이 깊으면 새벽은 가깝고 마음이 깊으면 말이 적은 법이다.

공행이 깊으면 깨달음이 크다.


진정한 학인은 극소수요, 불교 종단은 세속명리를 탐하여 타락해 가고있도다.

스승을 자처하는 도적은 많고 수좌를 자처하나 선량은 없도다.

승려 대신 백의[흰 옷의 속인]가 공부하는 세상이요,

비구는 잠자고 비구니가 공부하는 세상이 되었다고 한탄하시며,

"학인이 스승을 찾아다니는 세상이 아니라 도리어 스승이 학인을 찾아 나서는 세태가 되었도다."


저들은 악인입니까?

"법을 믿지 않는 까닭이니라."

지옥고를 받게 됩니까?

"선지식의 말씀을 따르지 않기 때문이니라."

어째서 그러합니까?

"저들이 스스로 마음에 고통을 일으키게 되니라."


100년의 인생을 師께서는 한마디로 "功行"이라고 부르신다.

"공들이는 가운데 불조의 本參公案이 열리기 때문이다.

혹 견성한 사람도 공들이지 않아 다시 쓸모없이 될수도 있다"고 하셨다.

참선공부에 세 가지가 구비되어야 하니 바로 큰 信心과, 큰憤心과 큰 疑心이라.


견성을 한 사람에게

공들이는 그것이 대신심이 아니고 무어냐?

견성을 한 사람에게

공들이는 그것이 대분심 없이 되던가?

견성을 한 사람에게

공들이매 스스로 큰 의심덩이 역력하지 않는가?


믿기 때문에 공들이는 것이요

분하기에 공들일 밖에 없을 것이요

의심덩이 뚜렷함으로 공들이는 것이요

공들인 果는 오도가 아닌가.


저들을 욕하여 제 몸만 상하고

비난하여 스스로 마구니 권속되니

피가 터지도록 떠들어 봐야 쓸모없나니

차라리 입다물고 남은 여생이나 보내리라.


"성품을 보고 깨닫는 일은 무슨 이유로든 미루어 둘 수 없는 일이니라.

이 일은 세상에온 一大事라. 불경을 가르치고 , 禪을 내세워 사람을 모아 주먹쥐고, 할하고, 게송이나 지으며 결국 검고 흰 것도 구별 못하면서도 이것이 禪 생활이니, 이것이 선의 기도니, 이것이 선적 염불이라 떠드는 자칭 선지식은 있어도, 직접 불조의 화제를 통해서 견성해 들어 갈 수 있도록 가르치는 선지식은 드물도다.

저 혼자 견성했다 떠들며 무리를 끌어 모으니, 굶주린 학인은 먹을 것이 없도다.

여우 새끼되어 재주부리며 佛祖의 흉내나 내며 말재주나 부리다가 염왕이 심판할 제 무엇을 이를겐가?

아는 자는 말이 없고 말하는 자는 모르니.

제자를 가르치지 못하면 그들의 병만 尤甚하게 되리니 스승과 제자가 함께 마왕의 자손이되니라.


한때 문경 봉암사에 가셨다가 낙상하셨는데 골절된 부위가 연로하셔서 접골이 되지 않아 열반하시기 전까지 혼자 걷지 못하신 채 주위의 부축을 받으시며 기동하셨으나, 조금도 고통스러워하시는 것을 곁에서 보지못하니, 오직 납자를 제접하는 일과 보임(保任)에만 전념하셨다.

어느 사암(寺庵)에 계시든, 어느 집 어느 길가에 계시든 그곳이 총림(叢林)이어서, 참선과 법담으로 항시 주위 학인들은 깨어 있어야 했다.

사(師)께서는 불편하신 노구(老軀)에도 불구하고 자주 동아병원 청운선실에 머무르시면서 환자, 의사, 간호사 등 많은 불자들에게 열반직전까지 法雨의 자비를 베푸셨다.

사(師)께서는 영겁속에 자리할 미래세(未來世)를 살피시고 조용히 선정삼매를 낙으로 삼고 지내면서도 불법을 공부하려는 사람에게는 마치 밤길의 등불처럼 누구에게나 친절하게 정성을 기울이셨다.


미국에 가셔서 한국선(禪)을 심자고 조르는 호기심 많은 측근들의 권유로 백세 노령이신 사(師)께서는 선뜻 한 생각 일으켜 미국행을 결행하셨으며, 3개월 남짓 미국에서 선법을 펴고 돌아오셨을 때는 건강이 매우 나빠지셨다.


입적하시기 얼마 전에 송하시기를,


갑자년 윤 10월 5일(11월 27일)

믿고 또 믿어 믿음이랄 것도 없는 곳에

절정에 이를 경허와 만공의 옛 자취가

한번 움직여 서양의 초조가 되었도다.


관광의 도시 로스앤젤리스 근교에는 수 많은 산업, 교육 도시들이 있었고, 특히 유능한 과학자들과 예술인들 그리고 자유종교인들이 살고 있었다.

오렌지 카운티에는 적어도 300만 이상의 상류계급 지식인들로 가득차 있었고, 특히 동남아시아 동구유럽 피난민과 전통적 영국계 남미계열의 지식층들이 더욱 밀집해 살고 있었다.

미국은 과연 '세계인의 백화점'이었다.

신문기자인 북구 덴마크 여인이 그 첫 상대가 되어 제일 먼저 찾아와 가장 큰 신문에 일면 톱기사로 한국불교의 최고 지도자가 이 땅에 온 까닭을 알리는 길조역할을 하였다.

매일 3,4십명씩 쉬지 않고 모여 들었다. 3개월여 동안 약 천명의 지식층을 만나시니, 그 중 3·4명은 아주 높은 경지에 까지 이르러 법명을 주시며 공부 잘 하여 대오할 것을 부촉 하시었다.

그러나 병든 老禪師에게 이 얼마나 큰 무리인가?

101세 생신에 큰 잔치를 열어 제자들과 미국 학인들의 축례를 받으신 얼마 후 무리한 대인 접촉을 견디지 못하시면서도 한사코 막무가내시더니 갑자기 기력이 떨러지면서 식음을 전폐하시고,


"내가 너희와 곧 작별할 것이니 그리 알라."

"언제 가시렵니까?"

"수덕사 인경 꼭지가 말랑말랑해질 때 가겠노라."

"어디로 가십니까?"

"화탕지옥으로 가노라."

"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가 도시에서 죽으면 영구차에 실어다가 화장장에 집어 넣을 것이고, 또 혹 산중에서 세상을 버린다면 상여도 할 것 없이 마구잡이로 들어다가 석유 한 사발로 불에 태울 것이요, 곧 돌아와서는 상단에 향 하나 꽂고 삼정례하고 영단에도 향 하나 꽂고 심경 한편 외울 뿐이지, 물질을 소비하지 말라.

또 나는 부처님 사리도 숭배하지 않는니라

사리가 있더라도 곧 땅 속에 파묻든지 아무데나 버리든지 할 일이지 만일 한 줌이라도 거두어 탑을 짓고 세우거나 한다면 나하고는 대천지 원수가 될 것이다.

사리라는 것은 오직 명안종사가 택한 사리만이 진정한 사리이기 때문에 본래 정법을 갖춘 선지식이 택사리할 제 소위 사리라는 것을 손바닥에 놓고 법력으로 관하면 음사리는 피고름으로 화하고, 탐사리는 구렁이나 뱀으로 화하고, 치사리는 도깨비로 화한다"고 하시고,

"그러나 진정한 사리라 할지라도, 심지어 부처님 진신사리라 하더라도 거기에 공경심을 내어 예배하거나 기도하지도 말 것이니 그 모두가 지옥으로 들어가는 業이 되리라.

왜냐하면 공경심을 내는 것이나, 예배하고 기도하는 것이 모두 상에 집착하여 일어나는 것이니 부처님 법과는 등지게 되기 때문이다"


무릇 있는 상은 모두 허망한것이니

도무지 실다운 상이 없느니라.

환과 같아 항상함이 없느것이니

이를 일러 無相之法이라 하느니라.


"다만 상을 취하지 않으면 저 성인의 뜻에 부합하고 일체의 상을 여의면 곧 부처님이라 이르니라"

나의 게송을 들으라.


佛과 祖師의 봉우리 위에

오래 숨겨 둔 사리가 나타나니

자신의 사리는 보지 못하고

대중들이 부산하게 치달리는구나.


내 부처님의 사리를 보니

부처는 사리에 있는게 아니라.

사리는 부처로조차 나왔으되

보는 부처가 부처의 사리를 보도다.


"그러므로 앞으로 재 불심종의 門徒들은 밝게 밝게 오로지 공부에만 정진하고 이 몸이 다하도록 무량한중생을 위해 무량 서원을 닦을 것이니라."


벽안의 제자들이 물었다.

"앞으로 공부를 어떻게 지어야 하며 누구를 스승으로 삼아야 합니까?"

"법을 스승으로 삼고 법에 의지하라.오직 공들이는 것만이 수행이니, 이 밖에 다른 할 일이 도무지 없느리라"


머무시는곳 미국에서 입적하리라고 고집하시었으나 제자들이 엎드려 빌며 고국 땅에서 기다리고 있는 많은 제자들을 생각하여 부디 귀국하실 것을 간청하였다.

겨우 허락을받아 모셔 건너오니 그 해 2월 16일이다.

제자들의 공부를 점검하시면서 3개월을 더 지내시었다.

제자들이 궁금하여 여쭈었다.

"正法眼藏은 누구에게 부촉하셨습니까?"

"공들인 자에게 부촉하니라."


덕숭총림의 초대 방장(方丈)으로 추대받고, 수덕사 대종불사(大鐘佛事) 및 중건불사(重建佛事)를 지도하시고, 한국 불교계의 다시없는 지보적(支寶的) 선지식으로 추앙받으시던 사(師)께서는 무리한 미국행으로 인해 더 이상 허물어진 집(肉身)을 지탱하기 어렵게 되셨던것이다.

1985년 5월 19일(음력 3월 30일) 깨끗이 닦은 몸에 오실 때처럼 실오라기하나 걸치지 않고 얇은 홑이불만 덮고 누워계시다가, 시각을 물어 예언하신 오전 8시 40분 辰時가 되었음을 확인하시고는, 허공을 향해 가로로 셋 세로로 하나를(三星下半月) 굿고 손을 떨구시며,한 호흡 멈추시니, 이로써 근대 한국 불교계의 최고승 최고령이신 명안종사(明眼宗師) 혜암 대선사(惠菴 大禪師)께서 세수 102세, 법랍86세의 육신을 버리고 고요히 열반에 드신 것이다.


사(師)가 남긴 열반게송으로,

"무상(無相), 무공(無空), 무비공(無非空)"이라

즉 "본래 형상도 없고 빈 것도 없으며 빈 것이 없다는 그것도 없다"라 하여 깨끗이 방망이 처리를 하시고 몸을 벗으신 것이다.


사(師)의 제자인 대의(大義).법우(法雨). 은봉(隱峯). 일묵(一默). 일봉(一峯)스님을 비롯하여 범행(梵行)스님, 그리고 송우(松友). 옥호(玉毫). 자선(慈仙). 효명(曉明).자용(慈蓉). 설호(雪湖). 연호(蓮湖). 진오(眞悟). 청우(靑雨). 우엽(雨葉). 도문(道門). 법수(法首)비구니 스님 등과 유발(有髮)상좌로는 활연. 인봉등 많은 이들이 사(師)의 법우(法雨)를 받아 佛恩을 입었으니 어찌 다 열거할 수 있으랴! 그밖에 많은 불자들, 그리고 대를 이어 혜명(慧明)을 이어갈 학인들....


이제 老師는 어디에 계신가?


만공스님께서 경허스님의 진경에 頌해 讚을 붙이셨는데,


빈 거울에는 본래 거울이 없고

깨달은 소는 일찌기 소가 아니로세.

소도 아니고 거울도 없는 곳곳마다에

살아 있는 눈 자유로이 술과 다못 색이로다.


만공스님께서 스스로를 讚自해 이르시기를,


나는 너를 여의지 않고

너는 나를 여의지 않았도다.

너도 나도 낳기 이전에는

미심커라 이 무엇인고?


師께서는 自讚하시되,


너는 너라는 그 <너>가 아니요

나는 나라는 그 <나>가 아니니

나와 너 둘 없는 그것이

곧 본래의 너와 나로다. "즉시" 악!


선사의 세수는 102세요, 법랍 86년이며 석존후 77대이시다.


여기 이제 仝年 만공스님 제삿날 지으신(음력 1984. 10.20.) 하나의 만장을 통해서 잠시 선사의 가신 곳을 엿보고자 한다.


태어나 한 티끌 맑은 바람 일구고

떠나서는 맑은 못 가운데 달그림자 흐르네.

인연 벗어 몸 버리니 어디로 갔는고

한양성 밖에 물은 東으로 흐르더라.


혜암선사는 젊은 수행승을 대하여 "사랑해 보았느냐, 구도란 것도 사랑의 열병을 앓는 것처럼 미쳐야만 깨침을 성취할 수 있다" 고 강조를 하셨다.


“참선을 어떻게 해야 잘 할 수가 있습니까?”

“마음에 머물고 고요를 관하는 것은 병이요 선이 아니다.

또한 마냥 앉아 있는 것은 몸을 구속하는 것일 뿐 깨달음에 무슨 이익이 될 것인가?

오직 화두를 들되 큰 의심으로, 크게 분심을 내어, 크게 의심하라”


三星下 半月이라 이 뭣고?



蕙菴門人- 淸峰 淸韻선사의 행장기록과 자문을 받아 옮긴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