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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봉청운대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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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76대 만공대선사

    행장기
    오도송 空山理氣古今外 白雲淸風自去來 何事達摩越西天 鷄鳴丑時寅日出 공산 이치가 다 고금 밖에 있고 흰 구름 맑은 바람은 옛부터 왔도다 달마대사는 무슨 일로 서천을 넘었는가 닭은 축시에 울고 해는 인시에 뜨는구나
    열반송 "이 사람 만공! 자네와 나는 70여년 동안 동고동락 해 왔지만 오늘이 마지막일세 그동안 수고했네. 그대와 나의 이승 인연이 다 되었네. 그럼 잘 있게"
    만공선사법훈

상세정보

 76조 만공선사

만공선사 (滿空禪師)

(1871∼1946)



근대의 고승. 여산송씨. 속명은 도암(道巖), 법호는 만공(滿空), 법명은 월면(月면). 전라북도 정읍출신. 신통(神通)의 아들이다.

1883년 김제 금산사에서 불상을 처음 보고 크게 감동한 것이 계기가 되어 출가를 결심하고, 공주 동학사(東鶴寺)로 출가하여 진암(眞巖) 문하에서 행자생활을 하셨다.

1884년 경허(鏡虛)의 인도로 서산 천장사(天藏寺)로 가서 태허(泰虛)를 은사(恩師)로, 경허를 계사(戒師)로 삼아 사미십계(沙彌十戒)를 받고 득도하셨다.

그뒤 "모든 법이 하나로 돌아가니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萬法歸一 一歸何處)."라는 화두(話頭)를 가지고 참선에 열중하셨다.

1895년 아산 봉곡사(鳳谷寺)에서 새벽에 범종을 치면서

"법계의 본성을 관찰하여야 한다.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만드는 것이다(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

라는 게송(偈頌)을 읊다가 홀연 깨달으셨다.

그뒤 공주 마곡사(麻谷寺) 토굴에서 보경(普鏡)스님과 함께 계속 수도하시다가 경허선사로부터 "아직 진면목(眞面目)에 깊이 들어가지 못하였으니 조주(趙州)의 무자(無字) 화두를 가지고 다시 참선을 하도록 하라."는 가르침을 받고 정진 하셨다.

1901년 경허선사와 헤어져 양산 통도사의 백운암(白雲庵)에 들러 며칠 머무르시는 동안, 새벽에 "원컨대 이 종소리가 법계에 두루 퍼져 칠벽의 어둠이 모두 밝게하소서(願此鐘聲遍法界 鐵圓幽音悉皆明)"라는 게송을 읊으며 범종을 치는 소리를 듣고 크게 깨달으셨다.

그리하여 곧 천장사로 돌아와 법열을 즐기시던 중, 1904년 함경북도 갑산으로 가시던 길에 천장사에 들른 경허선사로부터 전법게(傳法偈)를 받았다.

1905년 예산 덕숭산(德崇山)에 금대(金仙臺)를 짓고, 보임(保任)을 하는 동안 참선을 하려는 수도승들이 찾아와 그 지도를 맡게 되셨다.

1905년부터 1908년까지 3년 동안 금강산 마하연(摩訶衍)에서의 선 (禪) 지도와 1937년을 전후하여 잠시 마곡사의 주지를 맡으셨던 때를 제외한 대부분의 생애를 덕숭산에 머물렀다.

이곳에서 선을 지도하면서 선불교를 크게 중흥시켜 현대 한국불교계에 하나의 큰 법맥을 형성하셨다.

師는 덕숭산 수덕사와 정혜사(定慧寺)·견성암(見性庵), 서산 안면도의 간월암(看月庵) 등을 크게 중창하셨고, 1920년대 초에는 선학원(禪學院) 설립운동을 하셨으며, 선승들의 결사(結社)인 동시에 경제적 자립을 위한 계(契) 모임의 성격을 지닌 선우공제회운동(禪友共濟會運動)에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셨다.

마곡사 주지로 있으시던 1937년, 당시의 조선총독 데라 邇×각 도지사가 동석한 조선총독부 회의실에서의 31본산주지회의에 참석하여 한국불교를 일본불교화 하려는 총독부의 종교정책방침에 정면으로 반대하셨다.

그 반대의 요지는 종교가 정치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는 점과 한국불교가 조선총독부의 종교정책에 의하여 일본불교로 변질되어 계율이 문란해지고 한국불교의 전통과 종교적 순수성이 흔들리고 있다는 점을 강력히 주장하셨다.

그리고 "전 조선총독 미나미(南次郞)는 한국불교를 파괴시켰으므로 분명히 지옥에 떨어질 것이니 이 미나미총독을 우리가 지옥에서 구제하지 않으면 누가 구하겠는가."라고 하셨다.

1941년, 서울 선학원에서 개최한 전국고승법회에 초대되어 설법하시고 계율을 올바로 지키고 선을 진작시켜 한국불교의 바른 맥을 이어가자고 하셨다.

이론과 사변을 철저히 배제하고 무심(無心)의 태도로 화두를 참구(參究) 하는 간화선법(看話禪法)을 채택하셨고,

말년에는 덕숭산 상봉 가까이에 전월사(轉月舍)라는 초암을 짓고 생활을 하시다가 1946년 10월 20일에 입적하셨다.

세수 75세, 법랍 62세시었다. 

 


 오도송 


空 山 理 氣 古 今 外 (공산이기고금외)
白 雲 淸 風 自 去 來 (백운청풍자거래)
何 事 達 摩 越 西 天 (하사달마월서천)
鷄 鳴 丑 時 寅 日 出 (계명축시인일출)

 

공산 이치가 다 고금 밖에 있고
흰 구름 맑은 바람은 옛부터 왔도다
달마대사는 무슨 일로 서천을 넘었는가
닭은 축시에 울고 해는 인시에 뜨는구나

 

열반송

만공 스님은 입적을 하기전 열반송을 남기지 않았다. 다만 거울 앞에서 자신과 나눈 마지막 독백이 지금껏 열반송으로 알려져 있다.

"이 사람 만공! 자네와 나는 70여년 동안 동고동락 해 왔지만 오늘이 마지막일세 그동안 수고했네. 그대와 나의 이승 인연이 다 되었네. 그럼 잘 있게"

 

 

만공스님 法訓 나를 찾는 법 - 參禪法

 

1. 세상에는 나를 찾는 법을 가르쳐 주는 선생도 없고, 장소도 없고, 다만 불교 안에 있는 선방(禪房)에서만 나를 찾는 유일한 정로(正路)를 가르쳐 주나니라.

 

2. 수도(修道)한다는 것은 각자가 자기 정신을 수습해 가는 그 공부를 한다는 말인데, 누구에게나 다 시급한 일이 아닐 수 없나니라.

 

3. 세상의 학문은 당시 그 몸의 망상에서 일시의 이용으로 끝나고 말지만, 참선학(參禪學)은 세세 생생(世世生生)에 어느 때, 어느 곳, 어느 몸으로, 어느 생활을 하던지 구애됨이 없이 활용되는 학문이니라.

 

4. 선방만 선방이 아니라 참선하는 사람은 각각 자기 육체가 곧 선방이라, 선방에 상주(常住)하는 것이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黙動靜)에 간단(間斷)없이 정진할 수 있나니라.

 

5. 참선은 절대로 혼자는 하지 못하는 것이니, 반드시 선지식(善知識)을 여의지 말아야 하나니, 선지식은 인생 문제를 비롯하여 일체 문제에 걸림이 없이 바르게 가르쳐 주나니라.

 

6. 선지식을 만나 법문 한 마디 얻어 듣기란 천만겁에 만나기 어려운 일이니, 법문 한 마디를 옳게 알아 듣는다면 참선할 것 없이 곧 나를 깨달을 수 있나니라.

 

7. 법문 들을 때는 엷은 얼음 밟듯 정신을 모아 간절한 마음으로 들어야 하나니라.

 

8. 선지식은 선생이니 박사니 하는 막연한 이름뿐이 아니라, 일체 이치에 요달(了達)된 사람으로 불조(佛祖)의 혜명(慧命)을 상속(相續) 받은 분이니라.

 

9. ()와 사()는 같은 원()이라, 어느 각도에서 출발하든지 쉬지 않고 걸어가면 그 목적이 이루어질 수 있기는 하지만, 나를 발견하기까지는 선지식의 가르침이 없이는 될 수 없나니라.

 

10. 선지식의 법문을 듣고도 흘려 버리고 하여, 신행(信行)이 없으면 법문을 다시 듣지 못하는 과보(果報)를 얻나니라.

 

11. 선지식을 믿는 그 정도에 따라 자신의 공부가 성취되나니라.

 

12. 장맛이 짠 줄을 아는 사람은 다 공부할 수 있나니라.

 

13. 공부가 잘 되지 않는 것은 전생(前生)에 놀고 지낸 탓이니, 그 빚을 어서 갚아야 수입이 있게 되나니라.

 

14. 남음 없는 신심(信心)만 있으면 도의 기반은 이미 튼튼해진 것이니라.

15. 신심(信心), 분심(憤心), 의심(疑心) 세 마음을 합하여야 공부를 성취할 수 있나니라.

 

16. 신심만 철저하면 나의 정기(正氣)에 대상을 곧 정당화시켜서 자율적 성취가 있게 되나니라.

 

17. 법문을 듣고도 신심이 동()하지 않는 인간이라면 내세(來世)에는 다시 인간의 몸을 받기가 어려우니라.

 

18. 공부하는 사람이 제일 주의해야 할 것은 먼저 나를 가르쳐 줄 선지식을 택하여야 하고, 나를 완성한 후에 남을 지도할 생각을 해야 하나니라.

 

19. 명안 종사(明眼宗師)의 인가(印可)도 없이 자칭 선지식으로 남을 가르치는 죄가 가장 크니라.

 

20. 이 법은 언어가 끊어지고 심행처(心行處)가 멸한 곳에서 발견되는 도리라, 다만 마음과 마음이 서로 응답(應答)하여 상속하는 법으로, 선지식의 직접 가르침이 아니면 배울 수 없는 도리니라.

 

21. 공부는 발심(發心) 본위라 별로 제한 받을 것은 없으나, 학령(學齡)으로는 20세로부터 30세까지가 적령(適齡)이니라.

 

22. 참선법은 평범한 연구나 공부가 아니요, ()가 끊어진 참구법(參究法) 곧 터럭 끝 하나 얼씬거리지 못하는 경지에 이르러야 하나니라.

 

23. 백년의 연구가 일분간의 무념처(無念處)에서 얻은 한낱 이것만 같지 못하다.

 

24. 일체 중생은 날 때부터 이성(異性)의 감응(感應)으로 말미암아 세세 생생에 익히는 것이 음양법(陰陽法)이니, 정신 모으는 데는 이성적(異性的) 장애가 제일 힘이 센 것이니, 공부하는 사람은 이성을 가장 멀리 해야 하나니라.

 

25. 일체 생각을 쉬고 일념(一念)에 들되, 일념이라는 생각조차 잊어 버린 무념처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나를 발견하나니라.

 

26. 소아적(小我的) 나는 소멸되여야 하기 때문에 공부의 성취를 하기 전에는 썩은 그루터기같이 되어 추호도 돌아보지 않을 만큼 나의 존재를 없애야 하나니라.

 

27. 나를 완성시키는 데는 3대 조건이 구비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도량(道場), 도사(道師), 도반(道伴)이니라.

 

28. 도를 지키는 사람은 도절(道節)을 지켜야 하는 것이니, 도는 하나이다. 도를 가르치는 방법은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도절을 지키지 않으면 정신적으로 시간적으로 손실을 보게 되느니라.

 

29. 짚신 한 켤레를 삼는 데도 선생이 있고, 이름 있는 버섯 한 송이도 나는 땅이 있는데, 일체 만물을 총섭(總攝)하는 도를 알려는 사람이 도인의 가르침 없이 어찌 도인이 될 수 있으며, 천하 정기(天下正氣)를 다 모아 차지한 도인이 나는 땅이 어찌 특별히 있지 않을 것인가. 그리고, 도반(道伴)의 감화력은 선생의 가르침보다도 강한 것이니라.

 

30. 참선을 하여 인생 문제만 해결되면 억생(億生) 억겁(億劫)에 지은 갖은 악, 갖은 죄가 다 소멸되나니, 그 때는 46취에 헤매는 고생을 다시는 받지 않게 되나니라.

 

31. 수도(修道) 중에는 사람 노릇할 것은 아주 단념해 버리고 귀먹고 눈먼 병신이 되어, 일체 다른 일에 간섭이 없게 되면 대아(大我)는 저절로 이루어지나니라.

 

32. 참선법은 상래(上來)로 있는 것이지만, 중간에 선지식들이 화두(話頭)드는 법으로 참선하는 법을 가르치기 시작하여 그 후로 무수 도인(無數道人)이 출현하였나니, 화두는 17백 공안(公案)이나 있는데, 내가 처음 들던 화두는 곧 "만법(萬法)이 귀일(歸一)이라 하니

어디로 돌아갔는고?"를 의심하였는데, 이 화두는 이중적 의심이라 처음 배우는 사람은 만법이 하나로 돌아갔다고 하니, 하나는 무엇인고? 하는 화두를 들게 하는 것이 가장 좋으리라. 하나는 무엇인고? 의심하여 가되 의심한다는 생각까지 끊어진 적적(寂寂) 하고 성성(惺惺)한 무념처에 들어가야 나를 볼 수 있게 되나니라.

 

33. 하나라는 것은 있는 것도 아니요, 없는 것도 아니요, 이 정신 영혼도 아니요, 마음도 아니니, 하나라는 것은 과연 무엇인고? 의심을 지어 가되 고양이가 쥐를 노릴 때에 일념에 들 듯, 물이 흘러갈 때에 간단(間斷)이 없듯, 의심을 간절히 하여 가면 반드시 하나를 알게 되나니라.

 

34. 참선한다고 하면서 조금이라도 다른 데 미련이 남아 있거나, 인간으로서의 자랑거리인 학문이나, 기이한 재주 등 무엇이라도 남은 미련이 있다면 참선하기는 어려운 사람인 것이니, 아주 白紙로 돌아가야 하나니라.

 

35. 크게 나의 구속(拘束)에 단련을 치른다면 그 대가로 큰 나의 자유를 얻게 되나니라.

 

36. 예전에는 선지식의 일언지하(一言之下)에 돈망(頓忘) 생사(生死)하는 이도 있고,

늦어야 3, 7일에 견성(見性)한 이도 많다는데, 지금 사람들은 근기(根機)도 박약하지만 참선을 부업(副業)으로 해 가기 때문에 20, 30년 공부한 사람이 불법(佛法)의 대의(大義)를 모르는 이가 거의 전부니라.

 

37. 밥을 자기가 먹어야 배부른 것과 같이, 참선도 제가 하지 않으면 부처님도 선지식도 제도해 주지 못하나니라.

 

38. 참선하려면 먼저 6(六國) 전란(戰亂)을 평정(平定)시켜 마음이 안정되어야 비로소 공부할 준비가 된 것이니라.

 

39. 가장 자유롭고 제일 간편한 공부이기 때문에 이 공부를 할 줄 아는 사람은 염라국(閻羅國) 차사(差使)의 눈도 피할 수 있나니라.

 

40. 한 생각이 일어날 때 일체가 생기고, 한 생각이 멸할 때 일체가 멸하나니라. 내 한 생각의 기멸(起滅)이 곧 우주의 건괴(建壞)요 인생의 생사니라.

 

41. 말이 입에서 나오기 전에 그르쳤다 함은 물질 이전의 마음을 지적한 것이니라.

 

42. 공부가 잘 된다고 느낄 때 공부와는 벌써 어긋난 것이니라.

 

43. 꿈 속에서 공부해 가는 것을 증험(證驗)하여 선생으로 삼을 것이니라.

 

44. 꿈도 없고 생시(生時)도 없이 잠이 푹 들었을 때에 안신입명처(安身立命處)를 어디에 두는지 알아야 하나니라.

 

45. 꿈이라 하는 것은 업신(業身)의 동작인데, 깨어 있을 때는 생각만으로 헤매다가 잘 때 업신이 제 몸을 나투어 가지고 육신이 하던 행동을 짓는 것이니라.

 

46. 꿈과 생시가 일여(一如)하게 공부를 해 나아갈 수 있어야 하나니라.

 

47. 산 몸이 불에 탈 때에도 정상적 정신을 가질 수 있겠나? 헤아려서 미치지 못한다면 사선(死線)을 넘을 때 자기 전로(前路)가 막막하게 될 것을 알아야 하나니라.

 

48. 공부인(工夫人)이 공부를 아니하는 공부를 하여야 하는데, 공부 아니하기가 하기보다 더욱 어려우니라.

 

49. 공부를 잘하고 못하는 문제보다도 이 공부밖에 할 일이 없다는 결정적 신심(信心)부터 세워야 하나니라.

 

50. 오전(悟前)이나 오후(悟後)나 한 번씩 죽을 고비를 넘겨야 하나니라.

 

51. 참선(參禪)은 모든 업장(業障)과 습기(習氣)를 녹이는 도가니니라.

 

52. 사람을 대할 때에는 자비심(慈悲心)으로 대하여야 하지만, 공부를 위하여서는 극악극독심(極惡極毒心)이 아니면 팔만사천 煩惱魔를 쳐부수지 못하나니라.

 

53. 사형(死刑)이 집행될 시간 직전에도 오히려 여념(餘念)이 있을지 모르지만, 정진(精進) 중에는 털끝만한 어른거림이라도 섞여서는 아니 되나니라.

 

54. 공부하는 데는 망상보다도 수마(睡魔)가 두려운 것이니, 수마를 먼저 조복(調伏)시켜야 하나니라.

 

55. 인신(人身)을 얻기가 극히 어려운 일이니 사람 몸 가졌을 이때를 놓치지 말고 공부에 힘쓰라. 사람 몸 한 번 놓치게 되면 또 다시 만나기 어려울 것이니라.

 

56. 공부에 득력(得力)을 못하였을 때 안광낙지(眼光落地)하게 되면 인업(人業)만 남아 짐승도 미남미녀로 보여서 그 뱃속에 들기 쉬우니라.

 

57. 참선하는 사람의 시간은 지극히 귀중한 것이라, 촌음(寸陰)을 허비하지 말아야 하느니라.

 

58. 변소에 앉아있는 동안처럼 자유롭고 한가한 시간이 없나니, 그 때만이라도 일념에 든다면 견성(見性)할 수 있나니라.

 

59. 공부가 늦어지는 까닭은 시간 여유가 있거니 하고 항상 미루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니라. ‘자고 나면 오늘은 죽지 않고 살았으니, 살아 있는 오늘에 공부를 마쳐야 하지 내일을 어찌 믿으랴!’ 하고 매일매일 스스로 격려해 가야 하나니라.

 

60. 밤 자리에 누울 때 하루 동안의 공부를 점검하여 망상과 졸음으로 정진시간보다 많이 하였거든 다시 큰 용기를 내어 정진하되, 매일매일 한결같이 할 것이니라.

 

61. 공부하다가 졸리거나 망상이 나거든 생사(生死) 대사(大事)에 자유롭지 못한 자신의 전정(前程)을 다시 살펴본다면 정신이 저절로 새로워질 것이니라.

 

62. 사선(死線)을 넘을 때 털끝만큼이라도 사심(私心)의 여유가 있다면 참선하는 기억조차 사라져 없어지느니라.

 

63. 생사 윤회의 생활을 면하려고 출가한 중이니만큼 참선법을 여의고 하는 일은 모두가 생사법(生死法)을 익히는 것이니라.

 

64. 도라는 것이 따로 있는 줄 알고 구하는 마음으로 참선한다면 외도(外道)에 떨어지게 되나니라.

 

65. 설사 도인이 온갖 신통(神通)변화(變化)를 부리고, 죽을 때에도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이적(異蹟)을 보일지라도 이는 상법(相法)이니, 이런 상법이란 하나도 가히 취할 바는 아니니라.

 

66. 믿음은 부처를 찾아 오르는 발판이기 때문에 몰아적(沒我的) 믿음의 발판을 딛고 부처를 넘어 각자의 자기 정체(正體)를 찾아야 하나니라.

 

67. 선학자(禪學者)는 선학자의 행위를 엄숙히 가져서 입을 열지 않고서라도 남을 가르치게 되어야 하나니라.

 

68. 공부의 과정에는 지무생사(知無生死)계무생사(契無生死)체무생사(體無生死)용무생사(用無生死)의 네 가지 단계가 있는데 용무생사에 이르러야 비로소 이무애(理無碍)사무애(事無碍)하게 되는 대자유인이 되나니라.

 

69. 공부할 때에 짐짓 알려는 생각을 말고, 정진력만 얻으면 공부는 저절로 성취되나니라.

 

70. 공부가 완성되기 전에 미리 알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정진을 게을리하다가는 불법인연(佛法因緣)마저 떨어지기 쉬우니라.

 

71. 물체에 의존하지 아니하는 정신은 한 모양도 없는 자리에서 일체 행동으로 능히 현실화할 수 있나니라.

 

72. 정신은 물질의 창조자이지만, 물질이 아니면 정신의 존재와 효과가 나타나지 못하나니라.

 

73. 물질은 각자 그 이름에 따르는 한 가지 책임을 할 뿐인데, 정신은 이름도 형상도 없지만 만유(萬有)의 근본이라, 어디서 무슨 일에나 절대 능력자이니, 이 정신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다. 이 정신만 도로 찾으면 만능(萬能)의 인()이 되나니라.

 

74. 정신이라는 전당(殿堂) 안에는 생사(生死)와 선악(善惡)이라는 두 배우가 순번(順番)으로 삼라만상(森羅萬象)이란 배경 앞에서 희비극(喜悲劇)을 무한한 형태로 연출하고 있나니라.

 

75. 아무리 문명(文明)이 발달한 나라라 하더라도 도인이 없으면 빈 나라요, 아무리 빈약(貧弱)한 나라라 하더라도 도인인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그 나라는 비지 않은 나라이니라.

 

 

76. 도인(道人)은 도인이라는 대명사(代名詞)에 지나지 않는 도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명상(名相)이 생기기 이전 소식을 증득(證得)하여, 도인이라는 우상(偶像)도 여의고, ()니 수행(修行)이니 하는 구속에서 벗어나 완전 독립적 인간이 되어야 육도에 순력(巡歷)하면서 고()를 면하게 되나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