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봉선사의 강설
2. 금강경 강설 (講說) 서 론
惠菴門人 淸峯 淸韻 序
“금강경”은 무상(相)을 종(宗, 으뜸)지(旨)로 하고 무주(無住)를 체(體)로, 묘유(妙有, 지혜)를 용(用)으로 하여 도의 이치를 깨닫고, 그 지혜(智慧)로 리(理)를 깨달아 보아 본성(本性)을 요달하여 정각을 이루게 하려는 경이다.
본성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본성이 법성(法性)이요, 중생의 본래 면목이며, 우주 근본체이니 이를 일러 불성(佛性)이라고 한다.
각자가 본래 구족해 있으나 스스로 보지 못하는 이는 문자만 독송하고 글과 말에 끄달려 껍데기만 보나 지혜 있는 이는, 그렇지 않아서 깨달아 본성과 계합(契合)하게 되면 비로소 문자나 말에 있지 않음을 알게 되며, 자성을 밝게 터득하게 되면, 일체 제불이 나와 다르지 않음을 알고, 일체종지를 증득하여 모든 지혜가 발현(發現)하게 되는 것이다. 마치 보석이 돌 속에 있으나 돌이 보석인 줄 모르고 보석도 또한 이 돌임을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알면 이 보석을 찾아 유용하게 쓰게 되는 것 같이, 불성이란 이와 같아 나(我)라고 하는(상대적 거짓 나의) 산(山)가운데 무명에 뒤섞인 진여라는 보석의 광맥이 있고, 이 뒤섞인 광맥에는 번뇌망상이라는 我執(즉 집착)으로 인한 무명의 잡석이 보석을 덮고 있으나, 그 잡석을 제하면 본래부터 있던 보석을 찾아내어 지혜롭게 쓰게 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아상을 깨고 번뇌의 광을 수행의 용광로에 집어넣어 재마저 없이 하면, 없이 있는 보석 가운데서 지혜의 광(光)이 현발하게 되는 것이니, 바로 이것을 가르치는 길의 역할로 설한 것이 “금강경”인 것이다. 따라서 이 경의 골수는 정각성취인 깨달음에 있는 것이지, 문자의 의해(義解)에 있는 것이 아닌 것임을 알아야 한다.
금강반야바라밀경을 강설하기에 앞서 경의 이름을 우선 알아야겠다.
금강이라는 것은 가장 단단하고 견고(즉 불변)하다는 비유인 것이다.
반야라는 것은 지혜라는 뜻이니, 이 지혜는 분별을 여읜 지혜로 맑고 깨끗한 참 지혜이니 지(智)는 어리석음이 없음이요, 혜(慧)는 방편으로 이름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를 묶어 지혜라 하는 것은 이설이 없는 부동의 절대 진리를 깨달아 밝게 알고 쓰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라밀이라는 것은 저 언덕(밀다)으로 건넌다(바라)는 뜻이니,
건넌다(到彼岸)는 것은 생멸을 여읜 것을 요달한 것이다. 중생은 이 생멸 있음으로 잘못 알아 나고 죽음에 집착하므로 업이 쌓여 그 업보로 인하여 윤회를 면하지 못하는(此岸) 것이니, 내가 없음을 요달하여 집착을 털어 버려서 번뇌망상을 여의면, 진여(眞如)와 둘 아니게 되므로 대 지혜가 발현하게 되어 일체 법(眞理:일체종지)에 밝아 생사를 여의게 되어 곧 到彼岸(저 언덕, 밀다)에 이르게 되는 것이니 방일(放逸)하지 말고 정진할 일이다.
밀다는 근본체를 뜻하는 것이니, 곧 일체 만유의 근본체로 만법을 머금(具足)고 있으므로 불성이라 하며 일체가 원융(圓融)한 극치를 이름하는 것이다.
이 언덕(此岸)은 중생심의 마음이니, 어둡고 괴롭고 부자유하고 더러운 것이다. 왜냐하면 바른 지혜를 얻지 못하였으므로 암흑 속에서 헤매는 것과 같고 생사심을 갖고 있기 때문에 집착하고 괴로운 것이요, 육근의 종이 되므로 육진 경계에 허덕이기에 더럽다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혜를 갖추어 생사 없는 도리를 증득할 때, 곧 부처의 세계이므로 깨끗하고 맑고 청정하게 되는 것이다. 부처는 시방국토에 두루하여 밝고, 나고 죽는 생사심이 없는 즐거움만 있는 것이요, 걸림이 없어 구속받는 것이 없기에 자유롭고, 빛과 상에 물들지 않으므로 언제나 깨끗할 뿐이다. 그러면 실은 부처가 중생이요, 중생이 곧 부처인데 무엇이 다른고 하니 그것은 한 생각의 차이인 것이다. 깨끗한 마음이 곧 부처의 세계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앞생각 어리석음을 뒷생각이 밝아 문득 부처를 이루니
“부처라 할 때 곧 중생이요, 중생의 본체가 곧 부처인 것이다”
경이라는 것은 말이니, 곧 길이라는 뜻이다. 즉 가는 곳에는 길이라는 필요한 조건이 있으니, 그 길을 빠르고 쉽고 편하고 곧장 갈 수 있는 지름길로 가도록 일러준 것(즉 진리를 설함)이 경 곧 말씀인 길인 것이다. 따라서 진리와 성불의 바른 가르침을 설한 것이 길이요 경인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이 같은 종지를 말씀하신 것을 이름하여 “금강반야바라밀경”이라 한 것이다. 다시 이르자면, 법(眞理)은 문자에 즉하여 문자를 여읜 소식이니 사의(思意)로나 계교로나 가히 유심(有心)으로는 구하지 못하며, 가히 무심(無心)으로써도 얻지 못하며, 가히 언설로써도 미칠 수 없으며, 가히 적묵(寂黙)으로써도 통하지 못하니 하물며 장광설로써 이를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따라서 필경에는 모든 일체 근원인 마음(心)을 원상(○)으로 그 의지를 표현하려 했던 것도 그마저 방편일 뿐인 것이다.
또 세간을 여의고 불법을 찾으려 함도 마치 모래로 밥을 짓는 것 같음이니, 그러므로 세간의 말과 경계를 방편으로 쓰게 되는 것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여래선은 말 있음으로써 말없음에 이르름이요, 조사선은 말없음으로써 말없는데 이르름이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알아야 할 것은 경에 법이 없다 하면 부처님의 말씀을 비방하는 것이요, 경에 법이 있다하면 부처를 비방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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